생수.

AI 번역 · 영어 원문

물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나는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한 적이 있다.

내가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이야기는 이것이다.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너무나 깊이 경험해서, 그 순간만큼은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경험하고 나서조차 나는 다시 다른 곳을 찾아다녔다.

요한복음 4장에는 내가 자꾸 되돌아보게 되는 대화가 있다.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 계실 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온다. 예수님은 마실 물을 청하시고는, 자신이 생수라고 부르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 여인이 길으러 온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그녀 안에서 샘이 되어 영생에 이르도록 솟아난다.

그녀는 자신이 설명할 수 있는 필요를 안고 우물에 왔다.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깊은 필요를 채워 주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은 느끼면서, 정작 무엇이 부족한지는 모른 채 지낼 때가 얼마나 많을까.

공허하니, 무언가를 찾는다.

살 것. 이룰 것. 경험할 것. 잠시라도 자기 자신으로 사는 버거움을 덜어 줄 무언가.

술. 마약. 섹스. 돈. 명품 옷. 더 빠른 차. 더 큰 집.

서로 다르지만, 하나같이 같은 약속을 한다.

“이번에는 정말 이것만 있으면 충분할지도 몰라.”

때로는, 잠깐, 정말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그 느낌이 지나간다.

우리는 다시 목마르다.

이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야, 더 얻을 곳을 묻는 대신 우리가 마시는 것이 무엇인지 묻게 될까.

열일곱 살쯤, 처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을 때 나는 꿈을 꿨다.

사막에 있었고, 몹시 목이 말랐다.

그때 물이 든 유리병이 보였다. 마치 하늘에서 온 것 같았다. 위에서 빛이 내려와 그 병을 비추고 있었다.

그 물을 마시고 벅찰 만큼 충만한 만족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상으로는 사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음에는 무엇이 필요한지 곧바로 생각하지 않았다. 더 많은 것을 향해 손을 뻗지도 않았고,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나는 만족했다.

하나님이 그 꿈을 통해 자신에 관한 무언가를 보여 주셨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 아래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응답하실 수 있는 목마름이 있었다는 것을.

그 뜻을 알아들었고 다시 배울 필요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 후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에서 벗어난 때가 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다른 삶의 영역에서 만족을 찾으려 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들을 한 번도 즐겨 본 적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 않다.

즐거웠던 때도 있었다.

그것도 내가 계속 돌아갔던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무언가를 잠깐 즐기는 것과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밤은 끝난다. 흥분은 가라앉는다. 그토록 사고 싶던 물건은 거의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 된다.

결국, 다시 혼자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느끼지 않으려 애썼던 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때로는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도 그런 순간들을 겪었다. 내가 한 일은 결국 공허함을 미룬 것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들.

무언가를 느끼게는 했지만, 정작 나를 지탱해 줄 것은 찾지 못했다.

가장 괴로웠던 건, 하나님과 함께할 때는 다른 것을 경험했음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물을 마셨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면서도 물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백성이 생수의 근원이신 자신을 떠나, 물을 담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를 팠다고 말씀하신다.

그 모습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근원을 떠나 대체물을 만들기 시작한다.

일한다. 판다. 모은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것은 정작 필요한 것을 담아 두지 못한다.

이 장면이 내게는 너무나 와닿는다.

우리는 마침내 자신을 채워 줄 거라고 믿는 것들을 얻으려고 얼마나 애쓰는가.

그러다 그 느낌이 사라지면, 그저 더 필요하다고 여긴다.

더 많은 돈. 더 많은 쾌락. 더 큰 성공. 잠시 공허함을 잊게 했던 무엇이든, 더 많이.

우리는 그릇 자체를 의심하는 일이 드물다.

그저 계속 채우려 할 뿐이다.

아기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떠오른다.

여러 모양의 구멍이 뚫린 상자였다. 네모난 나무 조각은 네모 구멍에, 세모는 세모 구멍에, 동그라미는 동그란 구멍에 넣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내가 네모를 동그란 구멍에 계속 밀어 넣으려 하는 영상이 있다.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해 봤다.

여전히 들어가지 않았다.

그 영상을 보면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와. 나 진짜 어리석은 아이였네.”

그런데 어른이 된 후에도,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정확히 똑같은 일에 썼을까.

영적인 필요를 물질적인 것으로 채우려 하면서.

뜻대로 안 되면 답답해하면서.

그러고는 다시, 더 힘껏 시도하면서.

더 비싼 것. 더 짜릿한 경험. 더 강한 것. 더 큰 것.

굳게 마음먹고 충분히 밀면, 언젠가는 네모가 들어갈 거라는 듯이.

하지만 문제는 더 큰 네모가 필요한 데 있지 않았다.

애초에 맞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공간을, 그것으로 채우려 한 데 있었다.

영적인 공허함이라고 할 때 내가 뜻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한데, 정작 하나님만 빼고 다른 모든 것으로 그 자리를 채우려 한다.

그러고는 왜 아무것도 거기에 닿지 않는지 의아해한다.

좋은 차는 즐거울 수 있다. 돈은 삶을 편하게 해 준다. 아름다운 것을 누리거나 의미 있는 일을 향해 노력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소유물이 어떻게 나를 창조하신 분의 생명을 줄 수 있겠는가.

세상의 것을 더 갖는 일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아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꼭 그런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 우리는 종종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만큼 벌면 행복할 거야.”

그러고는 번다.

“드디어 저걸 갖게 되면 만족할 거야.”

그러고는 갖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결승선은 또 멀어진다.

한때 전부인 것처럼 보이던 것이 평범해진다. 한때 닿을 수 없어 보이던 곳에 서서는, 다시 다른 곳에 있기를 바란다.

언제쯤 그 약속을 의심하게 될까.

더 많이 갖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 ‘더 많이’가 ‘충분히’가 되는 순간이 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무엇일까.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목마른 사람을 자신에게 와서 마시라고 초대하신다. 요한은 이 말씀이 성령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더 좋은 기분이나 더 긍정적인 관점보다 훨씬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며, 그분의 성령을 받는다.

우리는 그분을 알도록 창조되었다. 바로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러 오신다.

잠시 그 뜻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평생 세상으로 나가, 생명을 줄 거라 기대하는 것들을 모은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샘을 말씀하신다.

근원 자체가 목마른 사람 안에 살러 오신다.

이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멀리 헤맸는지 아신다. 무엇을 향해 손을 뻗었는지 아신다.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나와 아무도 없을 때의 내가 어떻게 다른지 아신다.

그런데도 여전히 오라고 초대하신다.

생수는 선물이다.

그것을 살 만큼 근사한 인생을 가지고 우물에 오는 것이 아니다.

목마른 채로 오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깊이 겸손하게 한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 해명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의 방황을 좀 더 이해할 만하게 들리도록 만들고 싶은 마음. 속내가 낱낱이 드러나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 마음.

하지만 실제보다 덜 목말랐다고 하나님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

나는 마셔야 한다.

때로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기도는 그저 이것이다. “하나님, 제가 또 여기저기 찾고 다녔어요. 이제 지쳤어요.”

내가 요구하는 것을 줄 수 없는 것들을 원하느라 지쳤다.

잠깐 채워졌다가 어쩐 일인지 다시 비어 버리는 데 지쳤다.

생명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다른 곳을 찾도록 자신을 설득하는 데 지쳤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내 안의 무언가가 잔잔해진다.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아프다. 여전히 의문이 있다. 기도가 어렵고, 감정이 믿음을 곧바로 따라오지 않는 날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도, 내게는 속할 곳이 있다.

잘 보이려 애쓰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부끄러운 일에도 솔직해질 수 있다. 특별히 인상적인 말이 없어도 그분과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더 가까이 오라고 초대해 주신다. 그 안에는 쉼이 있다.

그분 가까이 살아갈수록, 예전에는 없으면 못 산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덜 절박해진다.

어떤 것을 즐기면서도, 그것에게 나의 정체성을 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무언가를 원하면서도, 그것을 얻기 전까지 내 인생 전체가 불완전하다고 믿을 필요가 없다.

아픈 감정을 느끼면서도, 당장 달아나야 할 필요는 없다.

내가 말하는 만족은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려, 스쳐 가는 모든 욕망을 삶의 방향으로 삼지 않아도 되는 삶.

하지만 이것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도 그분께 맡기고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원하면서도,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는 저항한다.

“왜 그걸 포기해야 하지?”

“왜 성경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지?”

“뭐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는 내가 알지.”

최근에 차를 정비사에게 맡겼다.

차에 대해 조금은 알지만, 나는 정비사가 아니다.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 설명해 줬을 때, 그가 나보다 차를 더 잘 알기에 그 판단을 신뢰했다.

하나님은 어떤 정비사가 차를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우리를 아신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고, 무엇이 우리를 해치는지 아신다. 우리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욕망 아래 숨은 필요를 이해하신다.

그런데 왜 나는 나를 창조하신 분보다, 나를 만족시키는 법을 더 잘 안다고 확신할까.

특히 내 생각을 따르다가 그렇게 자주 목마른 채 남았으면서.

나는 그 질문을 통해 순종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아시는 분에게서 온다.

때로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여전히 원하는 것을 놓는 일이다. 때로는 이유를 이해하기 전에 신뢰하는 일이다.

하지만 욕망만으로는 어떤 것이 내게 생명을 줄지 알 수 없다.

원했다가 결국 공허해진 것이 너무 많아서, 욕망에 그런 능력이 있는 척을 계속할 수는 없다.

요한복음에는 멈추지 않고 읽기가 어려운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신다.

생수를 주시는 분이 자신의 몸으로 목마름을 아신다.

나는 그것을 생각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초대하시는 사람들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분은 지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고통을 아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을 지나, 우리를 그분과 함께하는 생명으로 이끄신다.

그분의 초대는 대가를 치른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닿는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 무게를 더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물은 거저 주어진다.

그렇다고 값싼 것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손을 뻗었던 모든 것, 만족이라고 착각한 모든 것, 헤매던 모든 시간을 지나서도, 그분의 초대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오너라.

마셔라.

그 사실에는 내 마음의 방어를 무너뜨리는 무언가가 있다.

똑같은 교훈을 거듭 배우다 보면 내가 얼마나 쉽게 지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자신에게로 다시 부르는 데 지치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4장의 대화가 끝날 무렵, 여인은 물동이를 두고 마을로 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린다.

그녀는 무언가를 얻으러 왔다.

그녀는 한 분을 만난 뒤 떠난다.

나는 이 생각이 우리를 바로 그곳으로 이끌기를 바란다.

평생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다른 모든 곳에서 생명을 찾곤 하는, 그 하나님께로.

생수를 설명하면서 정작 우물 곁에서 목말라 죽는 데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지 않다.

나는 마시고 싶다.

- 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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